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테 알리기에리 (문단 편집) == 영향력 == '''서양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인 [[신곡]]'''으로 유명하며 실제로도 단테의 거리, 단테이즘, 그리고 단테를 연구하는 사람을 부르는 단테학자 등, 13세기 인물인 그의 저서들이 21세기인 지금도 학술적으로 연구되며 새로운 해석이 계속 나오고 있을 정도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던 시기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석학이자 작가이며,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있는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다. 그가 모국어 문학의 길을 제시했기에 페트라르카·보카치오·밀턴·초서의 문학이 탄생했다. 라틴어의 저속한 버전 취급받던 모국어 이탈리아어가 라틴어보다 오히려 우월하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글 창제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문학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대중이 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혁명적이었다. 미국 태생의 영국 문인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은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세계를 양분한다. 둘 사이에 3번째 인물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는 지옥편 제3곡에서 ‘훔친’ 표현이었다.] 영국 사회 비평가 [[존 러스킨]]은 단테가 “전 세계의 중심적 인간”이라고 평했다. 대중문화에도 영향력이 상당한데 서구에서 사후세계, 특히 지옥을 묘사한 모든 창작물은 크든 작든 신곡 지옥편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표준어는 근대국가의 산물이지만 특히 소규모 도시국가가 난립해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각 지역마다 고대 로마에서 사용한 라틴어에서 파생된 [[방언]]들을 일상언어로 삼았다. 이런 각 지역 방언들은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언어의 방언이라고 하기에는 또 미묘하게 차이가 큰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방언들 사이에서 '표준 이탈리아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중심축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단테가 사용한 언어였다. 그리하여 현대 이탈리아어는 토스카나 방언을 표준화한 것이 되었다. [[토스카나]] 방언이 근현대 이탈리아어의 모체가 된 것은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중부의 핵심도시인 [[로마]]의 경우 고위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라틴어]]가 교양인의 언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각국에서 온 고위 성직자나 사절들이 말하던 온 유럽의 언어들의 영향을 조금씩 받았던 탓에 이탈리아어의 모체로 삼기 부적절했던 탓이 크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경우, [[롬바르디아]] 방언은 지리적으로 알프스 이북의 영향, 즉 프랑스어 및 독일어의 영향이 큰 데다가 이탈리아에 합류하는 것이 늦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인 롬바르디아 지역의 [[롬바르드어]]는 일단 언어 계통상으로는 차라리 프랑스 남부 방언([[오크어]])에 더 가깝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북부에 위치한 특성상 알프스 이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당장 롬바르디아라는 지역명 자체가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에서 따온 것이고, 랑고바르드족이 세운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가 바로 롬바르디아 지방의 파비아였던 것.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사실상 편입되었으며, 신롬이 유명무실해진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다.] [[베네토어]]의 경우 그리스어, 튀르키예어, 독일어(오스트리아계)의 영향까지 받은데다가 미묘하게 다른 이탈리아의 각 방언들과 차이가 컸으며 남부 나폴리 지역의 나폴리어는 스페인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등 역시 이탈리아어의 모체로 삼기 부적절했던 면이 있었다. 즉, 문화나 지정학적 측면에서 피렌체 방언이 표준어의 모체로 가장 적절했으므로, 순수하게 단테의 공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셈.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이탈리아어|이탈리아 표준어]]의 모체가 된 것은 토스카나 방언이고, 자신의 저작을 통해 토스카나 방언을 갈고 닦은 단테가 실질적으로 현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이전까지 주로 라틴어를 쓰던 토스카나 지방의 교양인들이 지역언어로 문화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역시 단테가 자기 작품에서 사용한 언어의 완성도가 높았기에 단테의 언어를 기반으로 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로서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만렙]]을 찍은 셈. 또한 서구권의 [[단테]]란 이름 역시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본명에서도 나오지만 사실 단테의 본명은 두란테이며, 본래 단테는 그의 별명이자 애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